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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글쓴이 : 백두산 날짜 : 2009-03-02 (월) 14:19 조회 : 10685 추천 : 0 비추천 : 0


























룡정시



룡정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위치해있는데 동쪽은 연길시, 동북쪽은 왕청현, 서북쪽은 안도현, 서쪽은 화룡시와 린접해있으며 남쪽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과 린접해있다.전 시의 면적은 2,591평방키로메터에 달하고 2개 가두, 6개 진, 2개 향이 포함된다. 2000년말의 통계에 의하면 전 시 인구는 261,286명이였는데 그중 한족이 31.75%, 조선족이 67.11%, 기타 소수민족이 1.14%를 점하여 전 주에서 조선족비중이 가장 많은 시로 되었다.  


룡정시는 연변이 개척된이래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되었다. 1913년에 현이 설치되였으며 1988년에 시로 승격되였다.룡정시는 대부분 산지로서 평균해발고가 450m이다. 경내의 가장 높은 산은 쿵스레산인데 해발 1,331m이다. 룡정시의 기후는 중온대대륙성습윤계절풍기후구에 속하며 사계절이 뚜렷하다. 7월의 평균기온은 20섭씨도이고 년평균강수량은 500~600mm이다.



룡정시는 삼림면적이 총면적의 절반이상을 차지하여 림업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약재자원도 풍부한데 진귀한 약용식물이 186종에 달했고 야생경제식물이 1,072종에 달한다. 룡정시는 또한 길림성에서 가장 큰 송이버섯과 사과배 생산기지이다. 룡정시는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현재 개발할수 있는 자원으로는 석유, 연, 아연, 동, 금, 규회석, 석회석, 대리석 등이 있다.



룡정시에는 8갈래의 주요한 하천이 있으며 17개의 저수지가 있다. 물자원총량은 7.8억립방메터에 달한다.



룡정시는 개혁개방이후 비교적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2000년말 전 시 국내총생袁戮?10억원에 달했는데 그중 제1차산업이 26.6%, 제2차산업이 36.3%, 제3차산업이 37.1%를 점했다. 룡정시의 대외개방성과도 뚜렷한바 선후로 <사과배절>, <97년룡정국제투자무역회>, <98년룡정국제무역투자회> 등을 주최하여 대외경제련계를 강화하였다. 2000년말까지 룡정시의 외국상인투자액은 3,474만$에 달했고 삼자기업은 60호에 달하였다.



룡정시의 도로사정도 비교적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 룡정-연길간의 1급도로가 개통되였으며 장백산관광도로가 룡정을  가로지르고있다. 통신에 있어서는 전화가입자총수는 59,240호에 달한다. 룡정시에는 명승고적들이 많다. 주요한것은 조선족민속박물관이 있으며 유서깊은 대성중학교와 윤동주생가, 일송정, 룡정지명기원정 등 7개의 성급과 주급 문물보호구가 있다.




 
룡정(龍井), 뜻풀이를 하면 룡의 우물이다.



룡정부근의 지명을 살펴보아도 룡승, 룡지, 룡해, 룡강, 룡동, 룡광 등 《룡》자가 들어간 지명이 수두룩하다. 분명히 룡과 관련이 있는듯하다. 여기에 이런 전설이 있다.



먼 옛날 해란강기슭의 작은 마을에 아름답고 선량하고 부지런한 처녀가 살고있었다.



처녀는 늘 강가에 나가 빨래를 하였는데 하루는 장난꾸러기들의 손에서 거의 죽어가는 잉어를 구하여 물에 놓아주었다.

이 작은 잉어는 원래 동해룡왕의 셋째아들이였는데 하늘규률을 위반하였기에 룡왕이 그를 작은 잉어로 변하게 하여 강에 처넣었던것이다.잉어는 처녀의 손에서 다시 새 생명을 얻은 은덕에 감지덕지하여 처녀가 빨래질할 때마다 처녀앞에서 헤염치며 노닐었다. 처녀는 잉어가 다시 애들한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작은 잉어를 마을의 우물에 넣어주었다. 그날 저녁 잉어가 걱정되여 살그머니 우물에 와보니 영준한 총각이 처녀를 기다리고있었다.그 총각은 다름아닌 잉어가 변한것이였다.

이때로부터 이들은 달빛아래에서 아름다운 그림자를 남기면서 뜨거운 사랑을 속삭이였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에도 차디찬 서리가 내렸으니 이들의 혼인을 부모들이 결사 반대하였던것이다. 사랑에 더없이 충성한 처녀는 죽어서도 총각과 함께 있으리라 결심하고 우물에 뛰여들었다. 순간 우물속으로부터 한마리 청룡이 치솟아오르며 처녀를 받쳐들고 멀고먼 하늘나라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때로부터 룡이 날아오른 우물이라고 하여 이 우물을 룡정이라고 하였고 처녀가 살던 마을을 룡정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이외에도 여러 전설들이 세간에 전해지고있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허구, 과장, 상상이 가미된것으로서 진실로 믿을수 없지만 동시에 백성들의 아름다운 미학적리상이 깃들어있는것이다.

실제로 룡정의 개척력사는 100여년밖에 안되며 1870년대까지만 하여도 황량한 무인지대였다. 해란강과 륙도하 량안에는 버들과 갈대가 무성하였으며 지금은 종적을 감춘 수달도 많았다고 한다.

룡정에 처음으로 개척자들이 나타난것은 청나라의 광서년간이다. 이때 룡정에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세 부류였는데 남쪽에서는 조선이주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들어왔고 북쪽에서는 목단강과 녕안 등지에서 여진인들이 들어왔고 서쪽에서는 산동성, 하북성, 료녕성과 길림 등지에서 한족들이 들어왔다.



지리적인 원인으로 하여 조선인들이 가장 일찍이 이주하였고 그 인수도 제일 많았다. 룡정에 처음으로 조선인마을이 형성된것은 1877년 봄이였다. 조선 평안북도의 리재민 김언삼(金彦三)과 함경북도의 리재민 장인석(張仁碩), 박윤언(朴允彦) 등이 열네세대의 남녀로소를 거느리고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에 이른 다음 또다시 오랑캐령을 넘었다. 그리고는 륙도하를 따라 하루종일 인가도 없고 산림만 울창한, 길도 없는 길을 따라 걷고 걸어서 드디여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이르렀다.(지금의 룡정시의 분수음악공원) 이곳은 키넘는 잡초가 무성하여 황량하기 그지없으나 토지가 비옥하고 우량이 충족한 기후임을 보아낸 로농들은 벼농사짓기에 더없는 좋은 고장임을 알아보았다. 이들은 합심하여 움막을 짓고 또 불을 질러 터전을 일구고 밭을갈고 씨뿌려 한해 농사를 지었다. 첫해 농사가 유별나게 잘 되여 터지도록 잘 염근 낟알들은 이주민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으며 따라서 대대손손 배고픔을 잊으며 살아가려고 이듬해부터 집을 짓고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가 잘된다는 소문이 조선에 퍼지자 많은 농민들이 이땅에 모여들었고 점차 큰 마을을 이루게 되였다. 륙도하기슭에 있다하여 이때로부터 륙도구라고 부르게 되였다.

1886년 봄, 이 마을의 정준이라는 젊은이가 밭을 갈다가 우물자리를 발견하게 되였다. 우물은 오래동안 버려두어서 돌벽이 무너졌고 이끼가 낀 돌우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있었다. 정준은 장인석, 박윤언 등 사람들과 함께 무너진 돌벽을 다시 쌓고 흙을 파낸후 우물을 깨끗이 가셔냈다. 우물은 꽤나 깊었는데 맑은 물을 마셔보니 맛이 별맛이고 이가 얼어드는듯 하였다.



룡정은 조선이주민들이 회령과 무산으로부터 연길, 훈춘, 왕청 등지로 들어오는 교통요지였다. 길손들은 룡정을 거쳐 해란강을 건너 비암산너머 평강벌로 가지 않으면 모아산을 넘어 연길평야로 가게 되였는데 모두 이곳에서 하루밤을 묵어가거나 점심을 먹기 마련이였다.



오가는 길손들은 우물이 있는 이 조선인마을에서 보짐을 풀고 다리쉼을 하면서 우물의 물을 마시고 얼굴과 팔다리를 씻고 휴식을 하였다. 물을 마시려면 드레박이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마을에서 빌려썼으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쉴새없이 오가는 손님들이 빌려쓰게 되여 여간 시끄럽지 않았다. 후에 충씨라는 한족농민이 물마실때의 어려움을 덜고 드레박을 빌리는 시끄럼을 풀기 위해 나무를 찍어다 우물곁에 용드레를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륙도구의 조선족들은 용드레로 물을 길었고 오가는 길손들도 용드레로 우물의 맑은 물을 길어마셨다. 그리하여 점차 륙도구를 용드레촌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장인석은 천자문을 깨친 사람으로서 이주민가운데서는 박식한 사람이였다. 그는 박윤언과 상의하고 용드레에서 용《龍》자에 우물 정《井》자를 합쳐 이 마을의 이름을 룡정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1900년부터 청나라 관청에서는 《륙도구》와 《룡정촌》이란 지명을 함께 사용하였고 《9.18》사변후부터 《룡정촌》이란 이름만 사용하였다.

광복전까지 룡정은 《간도의 서울》로 불리워질 정도로 연변지역의 중심지였다. 1907년까지만 해도 룡정에는 조선족 96세대, 한족 5세대 도합 400여명밖에 안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이주해오는 이주민이 계속 증가되고 게다가 오가는 길손들이 많다보니 숙박집도 생기고 음식점과 점포들도 생겨났다. 청정부는 룡정을 관할하기 위하여 이곳에 상부국, 상부국순경국, 해관과 세연국을 설치하였고 한족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룡정시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또한 룡정시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룡정시은 일제의 마수가 제일 먼저 뻗친 곳이기도 하다.

일제는 소위 《간도소속문제의 미해결》이라는 구실을 대고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1907년에 룡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웠고 1909년에는 《간도 일본총령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동시에 일본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룡정의 주민은 급격히 증가되였으며 처음에는 작은 농촌마을이던 이곳이 몇년 안되여 자그마한 도시로 되였다.



1911년 5월에 룡정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거리의 절반이 타버렸다. 복구사업이 진행되자 사방에서 장사치들이 모여들어 거리에 집을 짓고 점방을 꾸리는 등 복구사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남북으로 빠진 한족거리와 련계된 조선족거리에 새로운 주택들이 일어섰고 잡화점, 려관, 국수집, 료리집들이 앞다투어 들어섰다. 일본통상지에는 일본양행, 조선은행출장소, 구제회, 각종 회사 등 건축물들이 빼곡이 들어섰다. 거리가 번창함에 따라 이주민이 증가되니 골목도 늘어났다. 큰 골목이 작은 골목을 낳고 작은 골목이 또 골목을 낳다보니 가로세로 뻗은 골목들은 마치 거미줄과 같았다. 지난날 룡정의 골목을 《아흔아홉골목》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인지는 몰라도 골목이 많고 흥성했다는것을 의미한다.

룡정은 광복전 조선족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이였다. 1906년에 조선의 유명한 애국지사들인 리상설, 리동녕, 왕창동 등이 룡정에 들어와 처음으로 근대식학교인 《서전서숙》을 창설하였다. 이듬해에 일제의 탄압으로 페교되였으나 이 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명동, 창동, 광성, 정동, 북일 등 강습소를 꾸리고 근대문명과 반일사상을 전수하였고 또 이런 강습소를 졸업한 학생들은 연변 각지에서 학교를 꾸리고 반일문화계몽교육을 하였으며 반일사상을 전파하였다. 1919년좌우로부터 룡정에는 각계의 인사들이 꾸린 대성, 은진, 광명, 동흥, 명신, 영신 등 남녀중학교가 창립되였는데 연변 각지는 물론이고 남만, 북만, 조선, 씨베리아의 류학생들까지 룡정에 와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민성보》를 비롯한 언론기관이 룡정에 자리잡았었고 유명한 문학동인회 《북향회》가 룡정에서 발족했으며 저명한 소설가들인 안수길, 강경애 등이 룡정에서 <북향보>, <인간문제> 등 장편소설을 창작하였고 암흑기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 저명한 문익환목사가 룡정에서 중학시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룡정은 연변에 있어서 반제반봉건투쟁의 요람이였고 맑스주의를 전파한 곳이고 중국공산당조직이 처음으로 건립된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3일, 조선의 《3.13》만세운동을 성원하기 위하여 룡정부근의 3만여명 군중들이 룡정에서 반일민족해방을 위한 집회를 가지고 반일시위를 단행하였고 그후에는 《맹호단》, 《철혈광복단》, 《철우단》 등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진행하여 연변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20년대초기에는 조선의 조기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조선공산당조직이 룡정의 각급 학교와 문화계에 들어와서 선진적인 교원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독서회》, 《사회과학연구회》 등을 꾸렸고 동시에 로동자들속에 들어가서 《건설자동맹》, 《로동회》 등을 조직하고 《동양학원》, 《로동학원》 등을 꾸리면서 맑스주의와 혁명사상을 전파하였다. 1927년 5월과 10월, 1928년 5월과 6월, 1929년말에는 조선공산당조직과 맑스주의단체들의 지도하에 선후로 기세드높은 반일혁명시위운동이 룡정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며 매차마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청소년학생과 군중들이 선진조직의 지도하에 떨쳐일어나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적수공권으로 일제의 무장경찰과 박투하였다.

1928년에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룡정에 중국공산당 룡정지부가 건립되고 10월에 중공연변구위(일명 동만구위)가 건립되면서 중국공산당이 연변에서의 항일투쟁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30년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붉은 5월》투쟁을 힘있게 전개하였고 5월 30일에는 혁명적군중과 학생들이 일떠나 폭력으로 룡정화력발전소, 동양척식회사 간도출장소, 조선인민회를 습격하고 파괴하였으며 천도철도의 해란강철교를 소각하여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런 투쟁가운데서 많은 항일명장들과 항일투사들이 출현하였는바 한락연, 리동광, 박봉남, 리용국, 리일평, 김근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룡정에서의 《붉은 5월》투쟁을 계기로하여 연변의 항일투쟁은 고조를 맞이하였고 투쟁방식도 무장투쟁으로 상승하여 곳곳에 항일유격대가 성립되고 항일유격근거지가 건립되였다.

<3.13만세운동>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깊은 사건이였다.이후로 룡정시는 우리 민족의 얼을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 되였다.

이주민에 의해 개척되고 해방전 연변의 중심지요, 서울로 되였던 룡정,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고향의 정든 우물과 그 우물에 깃든 아름다운 전설을 길이 전하고저 1934년 11월에 룡정촌주민인 리기섭이 발기하여 2메터 높이의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란 비석을 세웠다.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이 비석은 부셔렸고 뜻깊은 우물까지 흙과 돌에 묻어버렸다. 그러다가 개혁개방후인 1986년에 룡정시정부에서 우물을 찾아 복원하고 비석을 다시 세워서 옛날의 비석모습을 다시 볼수 있게 되였다.

현재 연길시에서 버스를 타고 약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연길못지 않게 우리 조선인 역사와 연관이 깊은 룡정시가 있다.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해란강


룡정시는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이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전국에서 제일 큰 사과배과수농장이 있으며 잎담배와 사과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룡정시에서 화룡으로가는 방향으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 선조들의 깊은 서러움이 느껴지는듯하다.







룡정시중학교


룡정시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가 있다.그 학교에는 여전히 조선족들이 다니고 있고 교사(校舍,쑈써)앞에 윤동주 기녑비도 있다.이학교는 룡정시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러보는 곳 중의 하나이다.



룡정시 동산에가면 기독교인들의 묘지가 있는데 이곳에 윤동주의 묘지도 있다.청명이면 학교학생들과 일부 유지인사들이 윤동주의 묘지에 찾아와서 꽃다발을 올리군 한다.또한 룡정시중심에서 삼합방향으로 10킬로 메터 가면 윤동주의 생가를 찾아볼수있다.







룡드레우물


룡정시에 있는 이 샘은 룡정시의 이름이 붙게 된 기원이 되는 곳으로 이 샘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지금은 그 자리에 룡정시지명기원지 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룽징띠밍치왠즈징쵄)이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있다.그곳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룡정시는 대한민국의 경남 거제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거제시에서 투자하여 이 룡정지명기원우물를 보다더욱 아름답게 수선하여 시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있는 공원으로 만들었다.현재는 많은 시민들이 밤낮 모여서 마음껏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소로 되였다.





서전서숙


서진서숙은 연변최초의 신식 사립학교요 또한 연변 모든 조선족사립학교의 어머니이다.1906년 8월에 반일 애국지사 이상설씨가 룡정시에 와서 이동녕,여준,왕창동,이상익 등과 함께 이 신식학교를 세우고 신학문과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이듬해 일제가 룡정시에 설치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서전서숙에 갖은 간섭으로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유서깊은 서전서숙의 옛터는 지금의 룡정시실험소학교(현재 룡정시의 가장큰 우리민족소학교) 구내에 있다.큰 고목이 몇그루 서있는 곳에 <서전서숙유지(瑞甸書塾遺址)>라고 힘있게 씌여져 있다. 또한 새롭게 룡정시청소년활동센터가 서전서숙옛터옆에 세워져 있다.





출처: 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추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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